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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위한 이야기

ENA(@ENA_157)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설원만큼이나 결벽적으로 새하얀 복도 위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정갈한 발자국 소리는 단지 그것만으로 상대의 품성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길게 드리워진 빈 복도를 홀로 거닐던 아르주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살펴봤다. 어느덧 저녁놀의 흔적마저 자취를 감춰버린 밤하늘은 새까맣게 무르익어 반드르르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벽면 대부분이 유리창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라 아직 오염되지 않은 남극단의 하늘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검푸른 잉크를 아낌없이 쏟아 부은 하늘이라 그런지 무수히 뜬 별들과 한쪽에 자리 잡은 손톱 모양의 달이 한층 돋보였다. 멀리서 들려오던 수런거림이 차츰 진정되자 아르주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살폈다. 저녁 식사 이후 후식을 먹으면서 늦게까지 담소를 나누던 서번트들이 그제야 하나둘 방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인리수복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칼데아라고 해도 하루를 마감하는 이 시간만큼은 긴장이 풀린 여유와 느슨한 안일함이 곳곳에 굴러다녔다. 낮 동안에는 여러 전투를 치르느라 피로가 쌓이고 긴장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으니 그 반동으로 휴식을 원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들의 시선을 피해 칼데아 안을 빙빙 돌아다니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순찰이었다. 마스터를 섬기는 서번트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위험에 대비할 줄 아는 자세를 유지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칼데아에는 아르주나 외에도 많은 서번트들이 마스터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고, 오지에 위치한 칼데아에 침입하는 외부 세력도 이때까지 파악되지 않았다. 아르주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 조용하고 조심스런 한숨이라 본인조차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아르주나는 잠드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서번트에게 있어서 수면은 불필요한 행위다. 안정적으로 마력이 공급된다면 그것만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특이점 수복을 이어나가면서 많은 서번트들이 소환되고, 그들을 유지하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리츠카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칼데아 측에서는 레이시프트를 제외한 칼데아 내 대기 상황에서는 리츠카의 마력 공급을 최소화하고, 부족한 마력과 피로 회복은 식사와 수면을 통해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한 방침에 아르주나는 어떤 불만도 품지 않았다. 문제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

 

“오늘도 무척 근사한 밤이에요, 아르주나.”

 

앳되고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아르주나는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소녀는 아르주나의 무릎에 닿을 듯 말 듯한 체격이었다. 분홍빛이 감도는 은회색 머리카락과 빛나는 연분홍빛 눈동자, 그리고 프릴과 리본이 잔뜩 달린 검은색 기조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평소처럼 동화책을 들고서 아르주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나요, 너서리 라임.”

 

아르주나는 소녀를 위해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춰 시선을 나란히 맞춰줬다. 평소에도 레이시프트나 칼데아 내에서 종종 어울려 다닌 적이 있어서 그런지 너서리 라임을 대하는 태도가 퍽 친근했다. 너서리 라임도 아르주나의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물론 실제로도 왕자님이었다.) 같다고 말하면서 졸졸 쫓아다녔다.

 

“혹시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오늘은 마스터와 함께 동화를 읽기로 했는데, 마스터가 갑자기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했어요.”

 

너서리 라임은 금세 풀이 죽은 표정을 드러내더니 발끝으로 복도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물론 리츠카가 다른 뜻이 있어서 일부러 너서리 라임과의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거절한 것이었고, 너서리 라임도 그런 리츠카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줬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속상해지는 게 아이의 여린 마음이었다. 너서리 라임은 흘끔거리며 아르주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동화책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 밤에 저를 위한 동화를 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렇게 사랑스러운 부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아르주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동화책을 받아들었다.

 

“저로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낭독자로서 평가할 때, 아르주나는 낭독에 있어서 제법 적합한 인물이었다. 새어나가지 않고 확실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반듯한 발음, 부드럽고 맑은 미성과 온화한 말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절한 템포, 절제되어 있으나 상황에 따라 적당히 구사되는 연기력, 그리고 간간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이와 눈을 맞춰주는 걸 잊지 않는 센스까지. 그래서 너서리 라임은 마스터인 리츠카 다음으로 아르주나를 찾아가 동화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동화는 눈으로 읽을 때와는 다른 생동감과 감미로움, 그리고 상냥함이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를 통해 너서리 라임은 아르주나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느꼈다. 그가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더.

너서리 라임은 침대에 누워 한창 동화책을 읽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아르주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은은한 전등 불빛에 반쯤 비춰진 아르주나의 얼굴은 평소보다 차분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옮겨서 빛이 닿지 않는 곳을 응시했다. 그의 등 너머,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도사리고 있는 그늘은 밤의 고요함을 덧입어서 그런지 더욱 짙어보였다. 그늘. 그의 얼굴 위에 물결처럼 어른거리는 손 그늘의 기척.

아이들의 영웅, 동화의 총체인 너서리 라임에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이자 동화책이기에 상대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동화책을 읽어나가는 것과 같았다. 소녀는 아르주나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예의바른 미소와 전사로서의 늠름함, 그에 걸 맞는 기품과 그럼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예의바른 태도. 항상 침착한 태도로 미소를 그려내면서 어떤 임무라도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그는 정말 동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완벽한 왕자님 같았다. 그러나유심히 들여다보면 옅은 그늘이 있었다. 드높게 빛나는 만큼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있었다.

읽을 수 없는 페이지, 숨겨진 이야기.

너서리 라임에게 있어서 아르주나라는 사람은 멋지고 근사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내용과 의미는 읽어낼 수 없는 은밀한 이야기였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이야기. 펼쳐봐서는 안 되는 페이지의 뒷면.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이야기일까.

 

“오늘은 아무래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모양이죠?”

 

아르주나의 말에 너서리 라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르주나를 마주봤다. 늦은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직 잠들지 못한 소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이 또렷했다.

 

“그러고 보면 아르주나는 잠을 자지 않나요?”

 

뜻밖의 질문에 아르주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곧바로 평소의 자세를 되찾았다.

 

“원래부터 서번트에게 있어서 수면은 필수적인 행위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꿈을 꾼다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랍니다. 달콤한 잠에 빠져서 행복한 꿈나라로 떠날 수 있어요!”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꿈에 대한 순수한 낭만을 말하는 너서리 라임을 앞에 두고, 아르주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다.

기나긴 밤, 모두가 잠자리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고 나면 아르주나는 혼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방안에 가만히 누워있거나, 가끔씩 답답할 때면 기척을 죽이고 칼데아 안을 배회하곤 했다. 아르주나가 살아있는 인간이었다면 로마니는 그에게 극심한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서번트였고,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될 일은 없었다.

서번트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생전의 경험을 단순히 복기하거나,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은밀한 내면의 심상을 들여다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적요한 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반듯이 누워 저항 없이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풍경이 있다. 영령의 좌에, 영혼에, 존재에 새겨진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지워지지 않은 것이었다.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피비린내를 풍기는 마른 바람. 절망으로 토해내는 단말마. 지천에 널려져 썩어가고 있는 시체들. 원망과 한탄. 상실의 비통함과 생존의 허무함. 잃어버린 목숨. 빼앗아야 했던 목숨. 신들의 축복. 숙적을 쏘아 맞춘 화살.

출구 없는 미궁. 흩날리는 꽃잎. 손에 쥔 단도. 왕좌에 앉아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반복되는 꿈에 언젠가부터 밤마다 하릴없이 칼데아 안을 돌아다니다가 방안에서 명상을 하는 일이 잦아지고 말았다. 어느 쪽이든 간에 마스터는 물론이고 눈앞의 소녀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아르주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아르주나를 한참 바라보던 너서리 라임은, 무언가 결심을 내린 것인지 갑자기 상체를 반쯤 일으켜서는 침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체구가 작은 너서리 라임이 안쪽으로 바짝 물러나니 그럭저럭 한 사람 더 누울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러면 오늘은 저와 함께 꿈나라로 가도록 해요, 아르주나.”

“네?”

 

재촉하듯이 빈자리를 작은 손으로 탁탁 두드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마스터도 동화책을 읽고 나면 저와 함께 꿈나라로 가주세요. 그러니까 오늘은 아르주나랑 같이 잠들고 싶어요.”

“하지만 마스터와 달리 제가 누우면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고집을 드러내는 너서리 라임의 제안에 아르주나는 망설였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고서 매정히 방에서 나가려고 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아르주나는 너서리 라임과 눈을 맞췄다. 선명한 분홍색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무구함으로 한없이 빛나고 있었다. 저 눈빛을, 아르주나는 알고 있었다. 잠들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남는 밤이면 어린 동생들이나 자식들은 아르주나에게 달라붙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보챘고, 아르주나는 그런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영웅들의 전설이나 위대한 신들의 일화들을 들려줬었다. 오로지 찰나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그래서 덧없고 허망했지만, 그럼에도 애달프고 그리워서 차마 지워내지 못하고 떨리는 손끝으로 간신히 매만질 수밖에 없었던 평온.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등불.

그것은 너무나 아득히 먼 지평선에 걸쳐져 있어 온기조차 전혀지지 않았지만,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빛의 잔상만큼은 시야에 흔적을 남겼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리움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르주나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침대 안으로 들어와 몸을 뉘인 뒤 그 위에 두툼한 이불을 덮었다. 그러자 너서리 라임도 기뻐하는 기색을 만면에 드러내고는 자신도 재빨리 침대에 누워 아르주나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어버리자, 아르주나도 뒤따라 푸스스 잔웃음을 흘렸다.

 

“자, 이제 시간도 많이 늦었으니 얼른 자도록 할까요.”

“네, 아르주나.”

 

짧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사실은 너서리 라임이 깊이 잠들면 몰래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막상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으니 뜻밖에도 졸음이 몰려왔다. 자신의 방보다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 때문인지, 제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새근새근 잠든 소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꿈을 꾸지 않고 편안히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감겨진 눈꺼풀 뒤로 아르주나는 자신이 엿보았던 추억들을 다시 들춰봤다. 지극히 소박하고 흔해 빠지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아르주나라는 인간이 가졌던 행복이었다.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일처럼 흔하면서도 누구도 함부로 깨뜨릴 수 없는 평온과 안식이 그곳에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아르주나의 고른 숨소리가 잔잔히 흐르자 아직 잠들지 않았던 소녀는 다시 눈을 떠서 고요히 잠든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은 평소에는 무척 보기 드문 것인지라 묘한 기분이 들어 계속 바라보게 만들었다. 동화를 읽다가 까무룩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처럼, 언젠가의 밤에 그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잠든 그의 얼굴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봤을 것이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혹여나 눈빛만으로 얼굴이 닳아버리지 않을까 걱정마저 들 정도로.

세상의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든 고요한 밤, 너서리 라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다음에 눈을 뜰 때엔 행복하길.”

언젠가는, 당신이 바라는 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 - ENA
아르주나, 그리고 아르주나 - ㅅ

아르주나 막간2, 2부 4장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그오에서 업데이트 된 아르주나 추가 보이스(인연대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입문 설정과 원전이 부딪치는 곳은 타입문 쪽 설정을 따릅니다.(ex카르나와 아슈와타마가 아비만유를 죽였다<는 원전 설정이 타입문 스크립트엔 등장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들을 말합니다.)

 

 

 

아르주나, 그리고 아르주나

ㅅ(@h_t00a)

 

 

 

방마다 감출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주인 없는 방 있는 방 가리지 않았다. 현재 칼데아의 에너지력을 모두 마력 보충으로 전환했다. 마스터로부터 마력을 받지 못하는 서번트는 정말 연약하기 짝이 없어진다. 바람에 휘날리는 민들레 홑씨처럼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흘 전 마스터가 자신의 방에서 증발해버린 이후, 레이시프트에서 보구를 전개하다 좌로 돌아간 서번트도 있었다. 이 여의치 않은 상황 덕분에 칼데아의 인력은 절반도 아닌 1/8 수준으로 똑 떨어져 버렸다. 로마니와 다빈치 같은 필수 인력 외에 상주 서번트는 대폭 줄었다. 대부분이 아처클래스며 단독행동 성질을 갖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닥터와 다빈치에게서 리츠카를 데려간 것이 사람이나 마신주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외계의 힘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방송을 통해 나온 것이다. 남은 서번트들 중에 전투인력으로 분류되는 아르주나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필요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몸의 훈기를 더해주던 찻잔을 티 테이블 위로 밀어둔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밑창이 얇고 앞코가 적당히 뾰족한 하얀 신발은 간밤 한기를 머금은 공기들을 하나하나 꾹꾹 앞발가락에 힘을 주고 밟았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걷는 소리는 외로움이 담긴 것만 같다.

 

회의실에는 희미한 촛불을 사이에 둔 채 작은 원탁 테이블에 앉은 인류 최후의 마스터가 사라진 칼데아 수뇌부들이 우울하게 앉아있었다. 잘생긴 얼굴들은 금방이라도 흐슬부슬한 슬픔이 부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직 어린 테가 싹 가시지 않은 작은 얼굴 우럭우럭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르주나에게 닥터가 피로한 인상으로 왔냐며 손을 흔들곤 차 내릴 준비를 했다. 어디 보자. 그는 일어서서 회의실의 서랍을 뒤졌다. 작은 상자 안에 갇혀 있던 오래된 찻잎들의 향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인도산 찻잎이 있었는데 창병을 대접하느라 그만, 다 써 버렸네.

 

“그러고 보니 카르나가 자주 오긴 했었지.”

다빈치가 거들었다.

 

아르주나의 기억에도 황갑이 부딪히는 소리가 근래 자주 들리긴 했었다. 회의실에 볼 일이 있어서 그리 자주 다녔던 거군. 그에게 새로 나던 희미한 냄새가 이 것이었나. 좋은 향이었다.

닥터가 내민 찻잔의 온기를 두 손에 담은 후 한 모금을 입에 담았다. 혀를 타고 목까지 넘어오는 따뜻함은 마치 찻잎에 닿았던 과거의 태양이 물에 녹아 있는 것만 같은 감각을 선사했다.

 

“떨어지기 전에 채워두려고 했다가 매번 잊었지. 포스트잇에 AEO의 찻잎, 두 통이라고 적어두기 까지 했는데.”

 

닥터가 모니터에 붙여뒀던 포스트잇을 손가락에 붙여 보여주었다. 어차피 그 차를 즐기는 사람은 둘이었거든. 카르나와 아르주나. 같은 국적의 영령이라 취향도 비슷한 건지 모르겠지만.

따로 찻잔을 마련해 두지 않아 큼지막한 머그에 담긴 찻물이 흔들리면서 안의 차분한 남자의 얼굴도 같이 일렁였다.

 

 

 

“그래서 아르주나. 우리는 리츠카를 데려간 게 세계 밖의 것이 아닌가 해.”

셋은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그의 하얀 얼굴에 촛불의 일렁임이 감돌았다.

“간단히 설명하면 그런 거지. 반대 세계의 억지력이라지만 일단은 억지력이니까. 세계의 부름을 받는 영령은 영향이 클 수밖에 없는 거야.”

간단히 설명한다고 했지만 내용은 전혀 간단치 않았다. 로마니가 눈을 부비며 대강의 설명을 덧붙인 뒤 헛기침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부탁해. 아르주나, 단독행동이 높은 아처 클래스의 중 최고위 영령이라고 할 수 있는 네게 마스터 후지마루 리츠카의 무사귀환을 요청할게.

 

 

* * *

 

 

아르주나는 마스터 방 앞에서 문을 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박한 방이다. 최후의 마스터면서 특별대우를 받지 않는 그녀의 성격다웠다. 후지마루 리츠카가 있었던 자리는, 실제로는 한 구역을 지칭해서 ‘자리’라고 할 수 없는 그 곳은 이제 하나의 구역이 되었다. 점점 방을 넘어서 점차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검은 연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또렷하여 육안으로 볼 수 있었고 젤리 형태의 무언가라고 하기엔 손 안에 잡히지 않는다. 물리법칙을 뛰어넘는 이 것은 어떻게 봐도 이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아르주나가 안으로 성큼 한 걸음 내딛었다. 새하얀 옷이 닿기가 무섭게 아르주나의 옷 끝자락이 물들어간다. 손을 앞으로 뻗어 보자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흐릿하게 보인다. 영령으로서는 최고위에 있는 아르주나에게도 이런 영향을 끼친 거면 현재 그의 마스터에게는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분명 아르주나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리츠카는 강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성년에 아직 이르지 못한 나이다. 동그란 얼굴에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소녀에게 가늠할 수 없는 무게의 짐이 달려있다. 아마 자신이 홀로 남겨진 그 삼일 동안 그녀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수도 없이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최후의 마스터, 최강의 전력이란 그런 것이었으므로. 하얀 장갑을 낀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자신의 무기를 어둠 속에서 소환해냈다. 마치 먹구름에서 벼락이 내려친 듯한 강한 빛이 한 순간 머물다 사라졌다.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떠오른다. 아직 칼데아의 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아르주나는 단번에 어둠 속으로 몸을 옮겼다.

 

 

 

피로를 느끼지 않는 서번트의 몸이라도 조금은 지칠 수밖에 없는 여로다. 쉼 없이 걸음해도 막히는 길 없고 방향을 틀지도 않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곳. 본디 혼자인 걸 즐기는 성격임에도 지금 같은 경우엔 다른 누구라도 있었으면 했다. 심지어 제멋대로인 소리를 하면서도 자신만의 의중을 쿡 찔러오는 카르나라도. 비록 살가운 소리는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체감조차 할 수 없는 긴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실수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보다는 카르나의 장단에 두들겨지는 게 나을 거다.

 

 

“…….”

얼굴에 닿는 어둠에서 기분 나쁜 훈기가 느껴졌다. 이 감각. 언젠가 느껴본 적 있다. 팽팽한 살의와 긴장감 속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때. 아니, 확실히 멈췄었다. 이런 어둠 따위보다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의 안에서 세계를 만난 적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모래 바람이 사라졌다. 아마 저 멀리 서있는 두료다나, 카르나, 아슈와타마, 그리고 스승님. 아르주나는 이름을 더는 외지 못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은 비애에 젖은 아르주나의 얼굴을 똑똑히 알아챌 수 있을 거다. 아르주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차마 죽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좋은 사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하지 못할 사람들이었으나 그 사람들은 확실하게 아르주나의 사촌들이었다. 스승, 친구, 다른 친척들. 그리고 아버지처럼 생각하기 까지 했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을 모두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화살촉처럼 생각은 일순 가슴을 꿰뚫었다. 왜 그런 경험 말이다.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마음은 쪼개진 것만 같고 숨조차 쉴 수 없으며 모든 재앙과 비극이 한 몸에 깃든 것만 같은 그런 순간. 아르주나는 생을 건 전쟁에서 적군을 이끄는 수장들의 얼굴에서 친근함을 찾고 그만 무너져버릴 것 같았던 것이다. 긴 세월 간 겪었던 고행도, 주사위 노름판에서 씻을 수 없는 모욕들도. 이것 보단 나았다. 13년의 고행을 해야만 했을 때 분명 뒤에 상황을 뒤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아르주나는 그 희망에 많은 살해를 해야만 하는 사실을 알기 전 까지는.

 

‘아, 얼마나 덧없는 일인가.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친족의 목을 베어야 하다니…….’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닦을 생각도 없는 전사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쓸모없는 몸뚱이가 된 것만 같다. 이 모든 힘과 천상의 무기가 친지들을 죽여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것들이었다니! 눈물이 흐른 자리에 모래가 묻는다. 아르주나는 그것을 닦을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이대로 바람에 풍화돼서 깎여 사라졌으면.

판다바 최대 전력의 장수가 할 법한 생각이 아니라지만, 불경한 뜻이며 의미없는 것이라지만. 아르주나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파르타.”

 

눈앞에 익숙한 미소를 짓는 친우가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천상의 신에게 기도했으리라고.

 

그때, 크리슈나는

‘쿤티의 아들아, 나의 위대함을 보거라. 바라타의 가장 위대한 자여’라고 말했다. 그대가 보기를 바라는 것과 훗날 그대가 보기를 바라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이 이곳에 있다.’ 라고 말했다. 셀 수 없는 많은 눈과 입, 장신구로 장식되어 있어서 빛나는 광휘와 함께 신성하기론 끝도 없는 존재가 드러났다. 크리슈나의 위대한 형체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죽음과 삶. 하나의 생이 모이고 한 마을의 생, 그리고 나라. 곧 이어서는 세계, 우주까지 펼쳐졌다. 아르주나의 몸이 검은 장막으로 뒤덮인 우주에 떠올랐고 그제야 알아챘다.

‘내가 하는 고뇌는 정말 이 거대한 급류 속에서 보잘 것 없는 것이구나.’ 아르주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옆얼굴에서 느껴졌다. 그건 마치 온 세계의 신, 이제껏 흘러왔던 시간과 흘러야 할 시간. 까마득한 과거, 그러니까 어둠 속에 비슈누 신만 있었던 그 순간부터 언젠가 올 비슈누만 존재할 지점. 그 모든 것들이 크리슈나의 시선에 따라 달라붙고 있었다. 무한한 힘의 감각이라고 밖에 아르주나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 * *

 

그러니까 그때 아르주나는 인간이었었기에 그렇게 느낀 거다. 영령이 된 지금 느끼는 감각은……. 어딘가 뒤틀린 모양새였다. 이 세계에 맞지 않는 법칙의 힘. 아마 다른 세계의 것이 아닐까, 하고 아르주나는 생각했다. 크리슈나가 보여주었던 신성체와는 다르지만 확실한 것은 아르주나가 체감하는 것 이상의 파괴력을 가진 것일 테다.

전투를 예감한 아르주나의 어깻죽지가 긴장으로 빳빳해졌다. 간디바를 소환한 뒤 자세를 잡았다.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고 자연스럽게 현에 메기려했는데……. 간디바는 평범한 장궁으로 변해있었다. 시바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방에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잠시 현에 메긴 화살에서 손을 뗀 뒤에 화살 통을 뒤졌다. 낭패다. 화살이 마르지 않는 마법의 화살 통 조차 이전에 쓰다가 다시 집어넣은 화살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화살의 개수는 고작 두 발이었다. 지금 메긴 것 까지 하면 총 세 발이었다.

대궁수인 아르주나가 놓치리란 법은 없지만 보통의 활과 화살로 변해 버린 지금 이 세 발로 미지의 적이 쓰러지느냐가 문제였다. 만약 급소를 노려도 퇴치하지 못한다면 그때라면 ‘영령의 좌’로 퇴거하는 것을 각오하고 몸의 마력만으로 대적할 수밖에 없다. 몸에 남은 마력은 파슈파타 위력의 1/8 정도에 준하는 힘이긴 했지만……, 간디바의 힘만 제대로 낼 수만 있다면!

시바의 힘을 차단할 만한 저 것은 무엇인가.

 

“……누구냐.”

“누구냐고 물었는가, 아르주나.”

“…….”

 

말을 마치고 그것은 꾸물거리며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허공에 떠있는 검은 인간의 형상. 눈코는 필요치 않다는 듯 달걀처럼 매끈한 얼굴위에 가로로 그어져 있는 선이 목소리가 나옴에 따라 벌어졌다 다시 다물었다. 이 일련의 과정은 매우 부자연스러웠는데 그건 마치 ‘저것’이 두 팔, 두 다리, 얼굴 하나를 가진 인간의 형체를 처음 한 것처럼 보였다.

 

“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칼데아에 남은 몇 되지 않은 대 영웅. 음. 몸에 휘두른 마력만 보아도 충분하군.”

 

아르주나는 간디바의 시위를 그것에게 돌렸다.

 

“잡담은 그만해라. 마스터는 어디 있지? 네 녀석이 납치한 소녀 말이다.”

“…….”

 

그것은 아르주나의 화살 끝을 보더니 짐짓 실망한 듯 어깨를 추욱 내려뜨리는 시늉을 했다.

 

“네 놈 정도의 영웅이라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알아챌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군.”

“무얼 하려는.”

 

거냐, 라고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그것은 다시 몸을 다시 구체로 만들고는 반죽을 뒤섞는 것처럼 몸을 이리 뻗고 저리 뻗는 등 마치 공상과학 영상물에서나 볼 법한 형태를 취하다가는 이내 아르주나가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것의 마력 색인 검은 색은 ‘크리슈나’의 검푸른 피부색과 무척 닮아 있었다.

 

“아르주나, 너는 쿠르크쉐트라의 평원에서 힘을 느꼈지 않았느냐! 크리슈나의 신성한 눈을 받고서 세계의 순리와 진리를 조금이나마 맛봤으면서 어찌 잊을 수 있는가!”

 

마력덩어리, ‘크리슈나’의 모습을 한 것의 노호는 방 안에 천둥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너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 이 세계의 부조리를!”

“…….”

 

웃으며 다가오는 미남자의 얼굴은 완벽하게 아르주나의 크리슈나를 닮았다. 검고 크게 파도치는 것 마냥 굽슬거리는 곱슬머리. 눈을 깜빡일 때 마다 별이 발광하는 것처럼 선함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깊은 속까지 복사해낼 줄은. 기분 나쁘게도 아르주나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 채 말을 거는 그 모습은 아르주나 기억속의 크리슈나와 같았다. 그런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다니. 그는 자리에 없는 크리슈나 대신 조용히 분노했다.

 

“부조리라니, 무슨 소리를.”

“그 전쟁이 과연 필요했는가! 아르주나여, 너는 알고 있지 않는가!”

 

한 순간 방안이 쿠르크쉐트라의 그 평원으로 변했다. 좁은 방은 양 옆에 두 군대를 사이에 두고……정말 자신은 그 아르주나요, 저 ‘크리슈나’를 닮은 괴생물은 ‘크리슈나’행세를 하려 들고 있었다. 점점 속이 뒤틀렸다. 네 녀석은 크리슈나가 아니다. 확신했다.

 

“무슨 궤변을!”

“네 아들 아비만유를 생각하라!”

 

‘크리슈나’의 말에 따라 땅 속에서 무장을 한 카우라바 전사들이 튀어나왔다. 그 반대편에는 아비만유가 자리했다. 그 모습에 아르주나는 혀를 씹을 뻔했다. 이내 장정한 카우라바 전사들이 아비만유를 둘러쌌다. 어림잡아도 열 댓 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르주나의 기억대로 움직였다. 단 하나의 아이를, 그것도 아직 성년조차 되지 않았었다. 많은 카우라바 전사들은 아비만유를 처참히 죽였다.

 

아비만유, 내 아들…….

아르주나와 아내 수바드라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크리슈나와 판다바 최고 장수인 아르주나를 섞은 아이이니 얼마나 대단할지 얘기하는 것이 가족들 사이에서는 큰 기쁨이었다. 나날이 쑥쑥 커가던 아이였다. 속 썩이지 않는 착한 아이였는데.

 

“그 뿐만이 아니다. 네가 카르나에게 날린 이 화살 또한!”

 

‘크리슈나’의 말에 따라 제 2막이 올랐다. 그 곳엔 아르주나와 전차 바퀴가 땅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카르나가 있었다.

 

“…….”

 

이건 잘 알고 있다. 크리슈나가 없는 곳에서, 카르나를 죽여야만 한다는 마음 하나로 그를 죽였었지. 그건 일생의 후회로 남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마스터 또한 위험에 빠트릴 뻔 했던 것이 바로 몇 주 전이다.

자신은 유려한 동작으로 화살을 겨누고 카르나의 목을 맞춘다.

 

“이것을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가라앉은 눈을 한 채 아르주나가 그것에게 물었다. 그 모습에 반색하며 ‘그것’이 웃는다.

……크리슈나는 그렇게 웃지 않아.

 

“오! 아르주나여. 이제야 알아주는 군.”

“목적을 말하라.”

“세계를 다시 만들지 않겠나? 나에겐 그만한 힘이 있도다……. 네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 네 후회를 날려줄 만한 힘을!”

“……!”

 

‘그것’이 손짓하자 방 한쪽에 현실이 찾아온다. 딱 한 사람이 누워 있을 정도만……마스터의 방으로 돌아온 채였다. 그리고 그곳엔 기절한 후지마루 리츠카가 있었다. 그 모습에 속에서 불같은 화가 치솟았다. 어찌 성년도 되지 않은 아이를……!

 

“네 녀석!”

“자, 아르주나여. 네 생의 모든 후회를 뒤집을 수 있는 기회다. 후지마루 리츠카를 뒤로 하고 내게로 오거라.”

“마스터! 정신 차리십시오!”

“소용없다. 저것의 정신은 시간과 공간의 틈에 끼어 있어서 네 목소리는 도달하지 않는다……. 나 같은 ‘신’이라도 되면 모를까.”

 

‘그것’은 천천히 다가와 아르주나의 앞에 선다. 공작의 깃털 모양을 한 귀걸이가 달랑거린다.

 

“그래, 신. 간디바의 힘을 잃는다면 보통의 궁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힘이 네 것이고 후회 따윈 남지 않는……그런 신 말이다. 아르주나여, 너라면 이해하겠지. 오, 아르주나. 아비만유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이라.”

 

신.

모든 걸 할 수 있다. 그래, 잘 알고 있다. 몇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크리슈나의 입 속에서 본 기억이 있지. 영령의 좌에서 보는 하늘 보다, 그러니까 억지력이 제공하는 우주. 그런 것 따위보다 크리슈나가 보여준 신성한 그 광경은 무한의 진리로 반짝이고 있었다. 큰 세계의 흐름. 그것을 이루는 생명체. 모든 것들의 운명…….

그 궤도를 신으로서 홀로 탈출한다, 는 것. 아비만유가 살아 있고 카르나에게 그 화살을 날리지 않는 것.

바라 마지않는 소망이다. 서번트로서 가장 바래왔던 것은 영원한 고독이었다. 그랬다. 몇 천 년 간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자비를 구할 필요도 없는 단 하나의 고독만을 원했지. 그러나 그건……

 

“과거의 소원일 뿐이지. 그런 것은.”

“…….”

“네가 말하는 모든 것. 전부 과거의 아르주나의 속에서 본 딴 것이다.”

 

아르주나는 ‘그것’이 만들어낸 아비만유, 카우라바의 전사들을 지나쳐 카르나에게 화살을 날린 자신에게 화살을 겨눈다.

 

“너는 나를 잘 아는 체 하지만 ‘나’만큼 잘 알지는 못하는 군. 내 ‘크리슈나(흑)’보다는 한참.”

“오오, 오! 아르주나!”

 

크리슈나의 형체가 무너져 내린다.

 

“……나는 후회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걸.”

 

시바의 힘이 담기지 않는 간디바의 화살이 매섭게 날아간다.

 

 

* * *

 

 

 

“바이탈 체크 정상. 심전도, 마력, 모든 것이 정상. 아르주나 모든 것이 정상임에도…… 본인이 느끼기에도 그래?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다면 말해줘. 할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할게.”

“저보다는 마스터를.”

 

로마니가 쓰게 웃으며 따듯한 찻잔을 내민다. 평소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결벽적인 흰 옷 대신 연꽃의 진한 쪽의 색을 닮은 민소매를 입은 아르주나의 모습은 확실히 고생한 테가 났다. 영기는 안정됐으나 마력 쪽은 아직 차오르지 않아서 전투 쪽으론 무리다. 아르주나 본인에게 말을 전하자 ‘그렇습니까.’하고 담담히 수긍했지만 오히려 발끈한 건 카르나쪽일 정도다.(그에겐 마력회로가 끊어져서 잠시 좌에 왔다 다시 소환됐다.)

 

“그래! 아르주나! 나도 뭔지 모르겠지만 눈 떠 보니깐 닥터랑 다빈치가 눈물을 줄줄…….”

“아니, 리츠카……! 언제 눈물을 흘렸다고.”

 

닥터 뒤쪽의 커튼이 휙 젖히자 그 안에선 리츠카가 의료 기구를 덕지덕지 붙인 채 누워있었다. 로마니가 리츠카의 입을 막으려는 듯 허둥대는 모습 뒤로 아르주나는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에겐 별 다른 피해가 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크리슈나’의 모습을 한 그것은 자신의 뜻에 맞춰줄 서번트. 즉 마력이 넘쳐서 장기 말로 사용할 만한 영령들을 찾는 모양이었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신성을 가진 영령 와중에 찾는 것 같았는데……마스터의 행운으로는 신성 성질의 영령이 부족해서 다행이란 불경한 생각을 아르주나는 속으로만 하기로 했다.

 

 

* * *

 

 

자신의 나라, 인도에는 환생과 윤회가 있다. 아르주나의 아이, 아비만유. 그의 환생을 과거의 아비가 간섭할 권리는 없다. 모든 과거는 과거 속으로. 그리고 과거에 대한 후회는……인간인 자신이 곱씹고 곱씹을 뿐. 그래서 현재의 다른 아이는 할 수 있는 한 마지막까지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이 아르주나가 바라는 새로운 소원이라는 것을 나중에 리츠카에게 말해두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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